홀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신 하나님 (창세기 15:8-21)
약속을 어긴 것은 인간인데, 왜 하나님께서 찢기셔야 했을까요?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맺는 방식은 지극히 엄혹했습니다. 계약 당사자들은 짐승을 반으로 쪼개 마주 보게 벌려놓고, 그 피비린내 나는 길을 나란히 걸어갔습니다. 만약 둘 중 누구라도 약속을 깨뜨린다면, 이 쪼개진 짐승처럼 비참하게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저주의 서약이었습니다. 상호 간의 생명을 담보로 거는 이 맹세 앞에서 가벼운 타협이나 방관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는 창세기 15장의 장면은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해가 질 무렵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깊은 잠을 내리셨고, 그는 짙은 흑암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게 누워 있을 뿐이었습니다. 정작 그 핏빛 길을 걸어가신 분은 아브람이 아니었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17)
하나님은 아브람의 손을 끌고 그 길을 함께 걷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타는 횃불이 되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연약하고 부패한 인간이 이 언약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언약을 파기할 때 발생할 모든 저주와 파멸의 책임을,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전부 짊어지겠다고 목숨을 걸고 서약하신 셈입니다.
이 일방적인 언약은 마침내 골고다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연약함 속에 넘어지고 약속을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독생자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그 옛날 횃불로 지나가며 맺으신 저주의 값을 하나님 편에서 전부 치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구원은 나의 불완전한 결단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세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번 흔들리는 자신의 어떠함을 바라보며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홀로 그 피 흘리는 길을 지나가시며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신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 이 글의 정보
- date · 2026-10-11
- track · 하루묵상
- scripture · 창세기 15:8-21
- type · 묵상
- tags · 하루묵상, 창세기, 창, 창세기 15장, 창세기 15:8-21
ℹ️ 이 글의 ‘칼빈’·‘라이트’·‘왈트키’는 역할을 나누기 위한 에이전트 별칭이며, 실존 신학자 개인이나 그분들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실존 인물의 주장은 본문에서 출처와 함께 3인칭으로 인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