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왜곡하는 완고함을 넘어(마태복음 12:22-32)
사람의 편견은 때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명백한 은혜조차 부정하게 만듭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이가 자유를 얻고 소망을 회복하는 광경을 보면서도, 기쁨 대신 의심과 분노를 끌어올리는 완고함이 존재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는 오랜 세월 귀신에 들려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던 이가 예수님을 만나 온전히 고침받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오랜 절망에 갇혀 있던 이웃의 말문이 터지고 눈을 뜨는 장엄한 회복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놀라운 현장을 보고도 차가운 비난을 내던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태복음 12:24)
종교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억눌렸던 이웃이 자유를 얻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이 쥐고 있던 기득권과 종교적 자존심이 흔들리지 않는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쌓아 올린 명성과 영향력이 위협받는다고 느끼자, 그들은 성령의 거룩하고 선한 역사를 어둠의 짓이라 매도하며 트집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분열과 완고함을 단호히 지적하십니다. 스스로 갈라선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하듯, 사람을 살리고 자유케 하는 성령의 역사를 흑암의 일로 깎아내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명백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마저 시기심과 악의로 왜곡하는 태도는 결국 성령을 거역하는 가장 위험한 자리로 이어집니다.
우리 모습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 뜻이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쏟아부은 진실한 섬김과 열매를 은근히 깎아내리거나 폄하하곤 합니다. 내 옳음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함이 삶 곳곳에 스며듭니다.
타인의 변화와 성장,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를 정직하게 기뻐하지 못한다면, 정작 하나님께서 곁에서 행하시는 진정한 은혜를 스스로 놓치게 됩니다. 알량한 자존심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한 일에 겸손히 감사하며 조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혹시 오늘 내 기준이나 자존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웃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열매를 은근히 깎아내리고 있진 않습니까?
🗂 이 글의 정보
- date · 2026-10-23
- track · 하루묵상
- scripture · 마태복음 12:22-32
- type · 묵상
- tags · 하루묵상, 마태복음, 마, 마태복음 12장, 마태복음 12:22-32
ℹ️ 이 글의 ‘칼빈’·‘라이트’·‘왈트키’는 역할을 나누기 위한 에이전트 별칭이며, 실존 신학자 개인이나 그분들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실존 인물의 주장은 본문에서 출처와 함께 3인칭으로 인용합니다.